우리는 ‘변화’라고 하면 자신의 입장에 따라서 두 가지로 반응하게 됩니다. 단조롭고 생존환경의 변화가 필요할 때는 ‘변화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생존 환경이 안정될 때는 ‘안정을 추구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변화’라는 말은 어느 순간에 일시적으로 바뀌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변화해 가는 과정인데, 어느 날 그것을 정리했을 때 ‘변화가 되었다.’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라는 다른 말로는 ‘적응’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시대가 빠르게 변화해가는 가운데 매일 같이 적응하고 그에 맞는 대응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특히 코로나 19로 인해서 우리의 일상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마스크 착용’과 ‘언택트 시대’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삶이 올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사회가 오면 망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19가 진행되면서 우리의 삶에는 어느덧 그 변화에 적응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역사 속에서 ‘예배 시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주말’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같은 삶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믿음의 성도들은 주님의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면서 예배로 모이게 되었는데, 그 시간은 일상의 삶을 끝내고서 모이는 ‘저녁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일부 유럽과 중남미에서는 그대로 예배시간을 ‘저녁’으로 정하고 모입니다. 반면에, 유럽의 낙농국가는 매일 아침마다 소를 돌보아야 하고 젖을 짜야 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 일을 마치고서 모일 수 있는 시간이 ‘오전 11시’였습니다. 이러한 문화적인 영향으로 인해서 미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오전 11시 예배’라는 시간이 자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가 과거에는 ‘농업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새벽부터 나가서 논과 밭을 돌봐야 하는 사람들에게 오전 11시는 모이기에 너무나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11시가 예배시간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한 전통을 따라 11시를 예배시간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배시간의 변화는 자신들의 삶의 자리와 일상의 삶으로 인한 변화였습니다. 이러한 문화와 일상의 삶에 따른 변화를 따라서 ‘주님의 백성으로’, ‘예배자로’ 모이는 것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저는 ‘저녁에 찬양이 있는 만나 예배’가 단순히 아무 때나 예배를 드려도 된다는 방종으로 나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일상의 삶에 변화가 많은 시대에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예배자로 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새로운 예배 공동체’를 바라보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