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세계가 ‘갈등’의 구조가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사회도 지역갈등, 세대간 갈등, 정치 갈등 등 매우 심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가정에서도 ‘갈등’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이런 갈등은 결국 모두를 상처나게 하여 아물지 않을 것 같은 아픔으로 남겨져 있곤 합니다.
지난 주간에 [용서와 화해 그리고 치유]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갈등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해서 생겨났으며, 어떤 과정을 통해서 치유가 일어났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 치유’라는 주제는 오랜 동안 교회에서 사용되어 왔습니다. 용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됨을 용서해주셨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화해’ 곧 ‘평화’를 주셨습니다. 이제는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은혜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치유된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되었는데 정작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과정에서는 수많은 갈등으로 인한 상처가 쉽사리 회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갈등의 해결방안은 두 가지로 알려집니다. ‘복수’와 ‘용서’라는 것입니다. 복수 가운데는 개인적인 복수와 정당한 법에 따른 처벌로 나뉩니다. 이처럼 정당한 법에 따른 처벌은 ‘정의’를 세우는 관점에서 진행됩니다. 그러나 ‘용서’라는 것은 자신의 아픔에 대해서 스스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상대방에 대한 어떤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당한 아픔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얻는 길입니다. 거기에 더 나아가 ‘화해’라는 것은 가해를 가한 상대방 혹은 상대국 등이 자신의 잘못을 철저히 반성할 때 더 나은 관계를 위해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한국사회는 사회생활에서 ‘용서’라는 것이 종종 강요되곤 합니다. 그러나 용서라는 것은 피해자 자신이 스스로가 그 아픔의 종이 되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양반과 상놈, 개화파와 수구파, 이념 등으로 인한 갈등이 최고조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때는 정의라는 법이 세워지지 않았다보니 자신이 직접 복수를 하게 됨으로 복수가 복수를 낳게 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이 쌓여서 오랜 분노와 아픔이 깊이 배어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용서와 화해’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자리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용서’하는 단계를 뛰어넘어 ‘화해’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해는 서로가 마주하고 함께 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