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날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침 기온이 낮아 일교차가 크긴 하지만, 봄의 따스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제 조만간에 봄꽃들이 만개하여 주변을 아름다움으로 물들일 것입니다. 봄철에 모두가 아름다움을 많이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최근에는 ‘성찬’에 대한 책들을 독서하며 성찬에 대한 깊은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이해의 깊이를 더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성만찬’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실상 신학교에서도 ‘성만찬’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도 거의 없었고, 실습은 아예 없었습니다. 나중에 석사과정을 공부하면서 예전학 시간에 초대 교회부터 현대에 이르는 성만찬에 대한 이해와 실습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찬에 대한 이해를 너무나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만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만찬에 대해서 너무 감정이입이 깊이 들어가야 은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교회가 개혁되면서 종교 개혁자였던 칼빈은 ‘말씀과 성찬의 균형 있는 예배’를 지향했습니다. 그런데 실상 성찬이 빠진 ‘설교 중심의 예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너무 ‘설교’에 치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는 ‘입례예전 – 말씀예전 – 성만찬 예전 – 파송’으로 이루어집니다. 입례예전은 죄 있는 인간의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겸손함으로 나아감을 의미하고, 말씀예전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듣는 시간이며, 성만찬 예전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허락하신 하늘의 만찬으로의 초대에 참여함이며, 파송은 세상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하며 하늘에 속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보내는 것입니다. 특히 성만찬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우리는 ‘상징’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실제와 상징을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다보니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성만찬의 깊은 이해는 결국 ‘교회의 공동체성’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의 빵과 하나의 잔에서 먹고 마심은 곧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서 가족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에서 ‘만나와 하나님이 주신 물’을 먹고 살았던 것처럼, 우리 역시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매몰되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하심’을 경험화고 사는 것을 또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만찬’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공급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만찬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의 양식을 이 땅에서 맛보는 것이며, 주님과 함께 하는 하늘의 양식을 바라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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