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며 부활의 소망을 고백하며 지키는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교회의 최초의 공회의인 니케아 공의회(325년)에서 결정된 것으로 춘분 후 최초의 만월 다음에 오는 첫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으로 지키지만 유대인은 유월절과 무교절 주간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축일은 성탄절이 아니라 ‘부활절’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님의 탄생에 초점이 맞추어 있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부활절에 교회에서 세례와 세례 갱신의 시간을 가집니다. 또한 부활절의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보다는 주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먹을 것을 바라보는 ‘기쁨의 성만찬’의 시간을 가집니다.
역사 속에서 교회는 성만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갈등을 겪어 왔습니다. 구교는 성만찬을 제사적인 의미와 주님의 실제적 임재를 중심으로 이해하다보니 성만찬의 떡과 잔을 너무 신성시 하게 되는 모양을 갖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개신교는 이러한 구교의 이해에 대한 반감이 너무 깊게 작용한 나머지 성만찬을 단지 상징하는 것이라고 너무 경시하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교는 예배의 중심이 말씀이 약한 성만찬인 반면에, 개신교의 예배는 성만찬이 없는 말씀 중심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였던 칼빈은 끊임없이 ‘말씀과 성만찬’의 균형있는 예배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러한 영향 보다는 미국의 천막집회를 중심으로 한 전도와 부흥회의 성격을 가진 설교 중심의 예배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최근에는 예배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를 가진 신학자들이 등장하면서 ‘말씀과 성만찬’ 혹은 ‘말씀예전’과 ‘다락방 예전’(성만찬)을 갖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예배임을 주장합니다. 성만찬은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전날 밤(목)에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시는 가운데 새로이 성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11:24)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기념하다’는 단어가 조금은 약화되었습니다. 원래 이 말은 헬라어로 ‘아남네시스’로 ‘기억하고 오늘의 사건으로 현재화하다’, 혹은 ‘회상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성만찬’을 헬라어로는 ‘유카리스’라고 하는데 단어의 뜻은 ‘감사’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늘의 양식을 ‘감사’로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대 교회부터 교회는 모일 때마다 ‘성만찬’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항상 고백하기를 우리가 사는 것은 세상의 질서 곧 밥이 아니라, 하늘의 양식을 주님께서 먹이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성만찬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유카리스와 주님이 공급하시는 하늘의 새 양식을 먹는 하늘의 사람들로서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