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간에 10년 만에 동기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아버님의 장례식장에서요. 장례식장에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장례나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마련인데, 서로의 사역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줄곧 얼굴에 슬픔 보다는 오히려 만남에 대한 기쁨이 컸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한참 동안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해서 사색해보았습니다. 분명, 아버지보다 제가 더 가깝지 않을 텐데도 오히려 아버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아파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몇 번에 걸쳐서 장례식장을 다니면서 느꼈던 생각입니다. 아마도 믿음의 가정들이기에 죽음으로 인한 이별의 안타까움은 있지만, 오히려 천국에 가셨다는 분명한 확신이 있기에 그러한 모습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과거에는 장례식장에서 웃음소리가 나면 분명히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 않게 보인다고 조심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장에서는 반가움의 웃음소리가 넘쳤습니다. 아마도 믿지 않는 분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때로는 고인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장례식장에서도 웃을 수 있는 이유는 분명 고인이 믿음을 따라 천국에 가셨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슬픔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을 갖고 있기에 보일 수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만의 특별한 모습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로서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잘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설교를 통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세상은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두려움이며 불확실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끝인 것 같지만, 주님의 품에 안기는 은혜와 축복의 시간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인생의 마지막이 있음을 알기에 그 시간은 언제인지 알지 못하지만, 오늘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갑니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날마다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에 말씀하였습니다. 즉, 사도 바울 역시 날마다 죽음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에 앞에 설 날을 묵상하면서 매일을 살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앞에 서는 날 곧 죽음의 날을 묵상하면서, 오늘을 최선을 다해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하겠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후외가 없으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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