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서로 다른 관점에 대해서 용납하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정치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서로의 삶에 대한 것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름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부정’하려고 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그리고 다름을 인정한다는 말은 서로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정’의 마음에는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의식이 매우 강하게 작용합니다.
또한 ‘해석’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법조문 등은 명료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자신의 입장에 따라서 교묘하게 다른 해석을 하곤 합니다. 다른 해석을 뛰어넘어 ‘언어의 왜곡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지금 우리 시대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의 재연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가 언어가 달라서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오늘날도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문구를 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하고만 이야기를 하다보니, 점점 더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저도 성경연구를 하다보면 종종 단어의 뜻을 찾느라 무척 고심을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은 ‘번역성경’입니다. 그러다보니 원어의 뜻을 찾아가는데, 막상 우리말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복잡하게 설명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종종 성도는 쉬운 답을 원하는데, 저는 더욱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또한 언어는 그 시대를 반영합니다. 거기에 같은 단어라 할지라도 사용하는 의미가 조금씩 변화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쓰였던 의미를 분명하게 확정해야 하고, 그것이 역사 속에서 어떤 변천을 겪게 되었고, 지금 우리 문화에서는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많은 분석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서로 다른 이야기로 결론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단어의 정의’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모두가 ‘헌법적 가치’를 이야기하는데, 막상 하는 이야기를 보면 전혀 상반되는 주장을 하는 모습을 매일 같이 뉴스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그러하기 십상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할 때도 언어를 좀 더 신중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서로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가 필요하기도 합니다.